[한겨레 사설 분석] [사설] ‘명태균 무상 여론조사’ 윤석열 2심 무죄, 납득 어렵다

서울고등법원이 항소심 선고를 내린 날은 2025년 봄이었다. 판결 요지는 간단했다. 명태균이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에게 제공한 여론조사 58회 가운데, 1심이 불법 정치자금으로 유죄를 인정한 14회분을 무죄로 뒤집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재산상 이익이 아닌 정치적 이익을 제공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자금법 위반을 구성하지 않는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납득하기 어렵다”고 썼다. 이 반응 자체가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겨레가 이 판결에서 잡아낸 프레임은 미묘하게 초점을 비껴간다. 한겨레의 문제의식은 “무죄 판결이 부당하다”는 데 있었고, 그 논거는 주로 1심 유죄 판결의 권위와 법조계 내부의 이견을 병치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쉽게 말하면, “법원들끼리도 의견이 갈린다”는 구도다. 이는 판결의 법리적 문제를 사법부 내부의 불일치 문제로 희석하는 효과를 낳는다.

진짜 문제는 법원들이 다른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이 아니다.

경제적 가치는 목적에 따라 사라지지 않는다

여론조사 1회에 드는 비용을 생각해보자. 표본 설계, 문항 개발, 조사원 인건비, 데이터 분석. 최소 수백만 원에서 규모에 따라 수천만 원이 드는 용역이다. 58회면 업계 평균을 가장 보수적으로 잡아도 수억 원 규모의 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된 셈이다. 이 돈이 “정치적 조언의 수단으로 제공됐기 때문에 재산상 이익이 아니다”라는 논리는, 법리 이전에 경제 상식과 충돌한다.

비유를 들면 이렇다. 어떤 회계사가 친구인 정치인에게 매달 세무 자문을 무료로 해줬다. 그 자문의 목적이 정치인의 선거 자금 관리였다면, 이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가 소멸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회계사가 청구했더라면 지불해야 할 금액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 가치를 무상으로 제공한 동기가 정치적인 것이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정치자금법이 규율하려는 핵심 상황에 더 가깝다.

항소심 재판부의 논리를 따라가면 기묘한 결론에 도달한다. 누군가 정치인에게 법률 자문을, 또는 광고 기획을, 또는 대규모 행사 운영을 무상으로 제공하더라도, 그것이 “정치적 목적”으로 제공된 것이라면 재산상 이익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 논리가 일반화되면 정치자금법의 우회 경로는 오히려 넓어진다.

반론은 있다. 재판부는 1심이 인정한 정황들—반복된 보고, 조사 방식 협의, 결과 공유—이 “정치적 교류”의 증거이지 금전적 대가 관계의 증거가 아니라고 봤다. 즉, 명태균이 여론조사를 제공한 것은 정치적 협력자로서의 자발적 행위였을 수 있고, 그 행위를 곧바로 불법 자금 제공과 동일시하는 것은 확대 해석이라는 시각이다. 이 논점은 나름의 법리적 근거가 있다. 정치자금법은 모든 형태의 지원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요건을 갖춘 정치자금의 수수를 금지한다.

그러나 여기서 1심과 항소심의 차이가 단순히 “판단의 차이”인지를 물어야 한다. 1심은 14회의 여론조사에 대해 구체적인 수수 관계를 인정했다. 항소심은 같은 증거를 두고 “증거가 부족하다”고 봤다. 동일한 기록을 읽은 두 법원이 정반대의 결론에 이른 이유가 단지 법리 해석의 차이라면, 대법원에 가면 또 뒤집힐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이 사건의 가장 불안한 지점이다.

한겨레가 비껴간 것

한겨레 사설이 제기한 “납득 어렵다”는 반응은 정서적으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그 사설이 정작 건드리지 않은 질문이 있다. 이 판결이 왜 이 시점에 나왔는가.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파면된 이후, 그와 관련된 각종 사건의 재판부들이 어떤 방향으로 판단을 내려왔는가. 사법부가 정치권력의 부침에 완전히 독립적인가, 아니면 시대 분위기와 권력 구도를 일정하게 반영하는가.

이 질문들은 음모론의 영역이 아니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법관 개인이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절연된 존재일 수는 없다. 같은 기록을 두고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법 해석에 재량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 재량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었는가를 묻는 것은 사법을 불신하자는 말이 아니라, 사법을 제대로 감시하자는 말이다.

한겨레는 그 감시의 눈을 “납득 어렵다”는 한 마디로 표현하고 멈췄다. 왜 납득이 어려운가. 어떤 법리가 문제인가. 항소심 재판부의 논리 중 어느 지점이 가장 취약한가. 이 질문들을 끝까지 밀지 않으면, 독자는 “법원이 나쁜 판결을 내렸다”는 인상만 갖게 된다. 그 인상은 분노는 만들지만 이해는 만들지 못한다.

분노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노는 다음 판결 앞에서 또다시 소모되고, 축적되지 않는다. 이 판결이 왜 나왔는지를 이해할 때, 다음에 유사한 구조의 판결이 나왔을 때 우리는 더 날카롭게 대응할 수 있다.

대법원 심리는 남아 있다. 항소심의 논리가 최종심에서도 지지될지, 아니면 1심의 판단이 복원될지는 아직 열린 문제다. 그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오든, 그 판결을 읽는 눈은 지금부터 벼려두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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