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반공웅변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공산주의는 악이며, 자유민주주의만이 인류의 희망입니다.” 그렇게 외쳤다. 준비한 대로. 그리고 그 말을 100퍼센트 믿었다. 의심 한 조각 없이.
지금 돌아보면 그 확신이 무섭다. 믿음 자체가 아니라, 그 믿음이 어디서 왔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다는 사실이.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의 세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태어날 때부터 그것이 세계의 전부였던 사람에게 “그게 이상하지 않느냐”고 묻는 건, 물고기에게 왜 물에 사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들은 물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게 물이라는 걸 배운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정말 달랐나.
나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배달되는 집에서 자랐다. 박정희의 경제 발전은 교과서가 가르치기 전에 밥상머리에서 먼저 배웠다. 전교조는 빨갱이고, 데모하는 학생들은 사회를 모르는 철없는 아이들이었다. 그것이 내가 처음 받아든 세계의 지도였다. 나는 그 지도를 의심 없이 펼쳤고, 그 위에서 방향을 잡았다.
그러다 철학과에 갔다.
철학이 내게 준 것은 답이 아니었다. 질문이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왜?”를 붙이는 훈련. 논리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권력이 설계한 내러티브일 수 있다는 감각. 그게 불편했다. 그동안 쌓아온 확신들이 흔들리는 느낌은, 솔직히 말하면 두려웠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시작이었다.
조중동을 조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에는 적어도 지형이 단순했다. 보수 언론은 저쪽이고, 나는 그것을 걸러 읽으면 된다는 감각이라도 있었다. 조선·중앙·동아의 프레임을 알아채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지적 자긍심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게 통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먼저 보여준다. 유튜브도, 트위터도, 네이버 뉴스도. 내가 동의할 말을 해주는 사람의 영상이 피드를 채운다. 그 안에서 나는 스스로 세계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알고리즘이 설계한 창을 통해 보는 것이다. 조중동이 만든 프레임과 구조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더 정교하게 내 취향에 맞게 재단되어 있을 뿐이다.
유시민이 그 예다. 2010년대 내내 그는 진보 진영의 지식인 아이콘이었다. 논리적이고 박식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그도 결국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었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정치적 결론을 먼저 세우고 팩트를 끼워 맞추는 것. 그것은 보수 언론이 수십 년간 해온 방식과 형식이 동일하다. 그가 진보였기 때문에 면죄부가 생기지는 않는다.
아이콘도 무너진다. 채널도 변질된다. 그러니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방법론을 믿어야 한다.
왜 이걸 하는가
블런트엣지를 시작한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내가 틀렸던 경험이 있어서다. 반공웅변대회 상장을 받았던 그 아이가 나중에 그 확신의 출처를 추적했을 때 느낀 당혹감. 그 당혹감을 나만 겪은 게 아닐 거라는 생각.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보수 언론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으로 프레임을 설계한다. 국민의힘은 그 프레임을 정치 자원으로 활용한다. 반대편에서는 팬덤 정치가 비판적 사고를 잠재운다. 어느 쪽에도 “이게 진짜 팩트입니다”라고 내놓고 따져보는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완벽하게는 못 하더라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달고, 그래도 지금 가능한 최선의 판단을 꺼내놓는 것. 불편한 방향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피하지 않는 것.
진보 성향이라는 말을 쓰지만, 민주당이 잘못하면 비판한다. 이재명 정부라고 무조건 편드는 게 아니라, 잘한 것은 잘했다고 못한 것은 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게 어렵지 않을 것 같지만, 팬덤 구조 안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무대에서 내가 완전히 옳다고 믿었다. 지금은 그 확신의 절반만 남아있다. 나머지 절반이 빠진 자리에 질문이 들어찼다. 그게 더 나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확신이 줄어드는 게 성장이라면, 블런트엣지는 그 과정을 공개적으로 하는 채널이다. 틀리면 고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그래도 결론은 낸다. 그게 이 채널이 존재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