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는 6월의 어느 날 사설 제목에 “통제불능”이라는 단어를 박아 넣었다. 추미애 의원과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를 한 줄에 묶고, 거기에 “與 무력감”이라는 진단을 붙였다. 기사가 아니라 사설이다. 즉 이건 중앙일보가 선택한 해석이다.
그 해석을 뜯어보자.
“통제불능”이라는 표현이 성립하려면, 지도부가 통제를 시도했음에도 실패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실제로 벌어진 일은 무엇이었나. 이재명 대통령은 강경 행보를 보이는 의원들을 향해 SNS로 직접 메시지를 날렸다. 김민석 당 대표는 공개 석상에서 제어 발언을 했다. 지도부가 침묵하거나 눈을 감은 게 아니다. 오히려 반응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의 정확한 이름은 “지도부의 내부 조율 시도”다. “통제불능”이 아니라.
중앙일보는 그 조율의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 잘라냈다. 지도부가 나섰음에도 의원들이 즉각 수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포착해, 거기에 “무력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서술 방식에는 묘한 기준이 숨어 있다. 지도부가 말했는데 당장 조용해지지 않으면 무력한 것이고, 조용해지면 통제된 것인가? 그 기준대로라면 어떤 민주적 정당도 “무력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 어렵다.
여기서 잠깐 뒤집어볼 필요가 있다.
중앙일보가 암묵적으로 대비시키는 이상적인 정당의 모습은 무엇인가. 당이 하나의 목소리로 움직이고, 이견이 외부로 새어 나오지 않는 조직. 국민의힘이 탄핵 정국 내내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밤, 그 다음날, 그 다음 주에도 국민의힘 다수는 집단적으로 침묵하거나 엇박자 없이 대열을 맞췄다. 그게 당시 보수 언론이 말하는 “통제되고 안정된 정당”의 모습이었나? 아니면 그냥 공포와 계산이 만들어낸 집단 침묵이었나.
민주당 내부에서 추미애 의원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지도부가 그것을 공개적으로 다루는 과정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을 방증한다. 당 안에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 공간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쪽은 독자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내용이 불편한 사람들이다.
이화영 이슈는 구성 자체가 더 노골적이다.
변호인 측이 특사 관련 입장을 낸 것은, 피고 측 변호인이 법적·정치적 경로를 탐색하는 행위다. 이것을 당 내부의 갈등 지표로 연결하려면 상당한 비약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사설은 그 비약을 “~이어지고 있다”는 서술로 처리한다. 연결이 아니라 나열이다. 추미애라는 이름과 이화영이라는 이름을 같은 문단에 두면, 독자의 뇌는 자동으로 두 사안을 하나의 위기 서사로 합친다. 사설은 그 인지적 효과를 노린다.
이건 팩트 오보가 아니다. 팩트 자체는 대체로 맞다. 문제는 편집이다. 무엇을 붙이고, 무엇을 자르고, 어떤 순서로 배치하는가. 좋은 저널리즘과 프레이밍 저널리즘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중앙일보는 각각의 팩트가 아니라 그것들의 배열로 “여당 혼란”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낸다.
이 방식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보통 이런 말을 듣는다. “그럼 실제로 내부 갈등이 없다는 건가요?” 아니다. 갈등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어떤 갈등인지, 어느 수준인지, 지도부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정확함을 생략하고 “통제불능”으로 요약하는 순간, 그건 보도가 아니라 판결이다.
여당 내부에 이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견이 있는 집단을 “무력하다”고 부르는 사회에서, 이견 없는 집단은 대체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그것도 “무력하다”고 불렀어야 했다. 다만 그 무력함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중앙일보 사설이 진짜 무력감을 드러낸 건, 여당 분석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택한 프레임에서다. 내부 토론을 혼란으로 번역하고, 조율 과정을 붕괴의 징후로 읽는 시선. 그 시선이 지금 어디를 향해 있는지는 명확하다. 그리고 왜 그 방향을 향하는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