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사설 분석] ‘박원순 추억’은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끼리 해달라

2020년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숨진 직후 조선일보가 한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피해자의 실명이 온라인에 떠돌 때, 가해자 지위에 있는 사람의 사망을 두고 일부 보수 진영이 “의혹”이라는 표현을 동원해 사건의 성격 자체를 흐렸을 때, 그 신문은 피해자 감수성을 기준으로 그 흐름을 비판했던가. 적어도 내 기억엔 없다.

그러다 이재명 대통령이 SNS에서 박원순을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분”이라고 언급하자, 조선일보는 사설을 꺼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이 피해자에게 불편하게 읽혔을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다. 성추행 피해가 법적으로 인정된 인물을 공적 공간에서 긍정적으로 호명할 때, 피해자가 받는 충격은 실재한다. 그 지점에서의 비판은 정당하다. 나는 그 비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비판의 진정성은 비판자의 맥락 안에서 평가된다.

조선일보 사설이 이 사안을 다루면서 반복한 표현이 있다. “같은 진영”이다. 이 대통령이 박원순과 “같은 진영”이었다는 것, 그래서 이 발언이 나왔다는 것. 얼핏 보면 정치적 동질감에 대한 분석처럼 읽히지만, 그 표현이 사설 안에서 하는 실제 역할은 다르다. 피해자 보호의 언어로 포장된 채, 이재명이라는 이름을 박원순이라는 이름 옆에 반복해서 붙여두는 것이다. 독자가 그 두 이름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미지로 합산하도록.

이것은 논증이 아니라 배치다.


피해자는 어디 있었나

조선일보가 피해자 감수성을 사설의 근거로 동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일관성의 조건 하나는 충족해야 한다. 박원순 피해자가 가장 고립되었던 시점에 그 신문이 어떤 포지션을 취했는지다.

사건 직후,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는 광범위했다. 고소인의 신원이 유포되었고, 일부 지지자들은 피해자의 동기를 공개적으로 의심했다. 그 분위기가 온라인을 달궜을 때, 조선일보는 그 흐름을 정면으로 겨냥한 비판을 썼는가. 보수 진영 일각에서 나온 “의혹 제기”식 보도 행태를 같은 강도로 문제 삼았는가. 사설 어디에도 그 대목은 없다.

피해자는 이번 사설에서 비판의 출발점이 아니다. 비판을 정당화하는 수사적 장치다.

이것이 내가 이 사설의 구조에서 가장 불쾌하게 읽히는 지점이다. 진짜로 피해자를 중심에 두는 논평이라면, 이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간 피해자를 소외시켜온 보수 담론의 책임도 같은 프레임 안에서 다뤄야 했다. 그 절반이 없다면, 남은 절반은 피해자 보호가 아니라 정치 공격이다.


선택적 피해자 감수성은 피해자 감수성이 아니다.

한국 보수 언론이 젠더 감수성이나 피해자 보호를 전면에 내세울 때, 그것이 진보 정치인을 겨냥한 구도와 얼마나 정확하게 일치하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성범죄 관련 보도의 기조, 안희정 사건 당시 피해자 지지의 온도, 그리고 이번 사설. 이 셋을 나란히 놓고 보면 패턴이 보인다. 피해자는 권력 비판에 유용할 때 전면에 나오고, 그렇지 않을 때는 조용히 사라진다.

이 대통령의 발언이 문제라면, 그 문제를 지적하는 데 조선일보의 사설이 필요하지 않다. 피해자 지원 단체가 이미 이 발언에 대해 공식 입장을 냈고,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불편함을 표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 비판은 진정성이 있다. 그것은 정치적 이득을 계산하지 않고 나온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사설은 그 비판과 같은 범주에 놓이지 않는다. 발언의 문제를 지적하는 척하면서, 그 발언을 소재로 다른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글이다. 피해자를 위한 글이 피해자를 도구로 쓸 수는 없다.

이 대통령이 박원순을 언급한 방식에 대한 비판은 유효하다. 그 비판은 피해자 당사자의 언어로, 그 고통의 무게를 온전히 담아서 이루어져야 한다. 조선일보의 사설처럼, 그 고통을 정치 공세의 수단으로 재단하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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