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사설은 2025년 6월 어느 시점에 이렇게 물었다. “집권당 대표가 조희대 탄핵을 공론화하는 것, 민심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냐”고. 질문 형식이지만 실은 답이 이미 정해진 수사다. 탄핵을 입에 올린 여당 대표를 무모한 정치인으로 규정해놓고, 독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구조다.
그 프레임 안에서는 조희대 대법원장이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탄핵을 꺼낸 여당이 ‘정치적’이라는 사실만 부각된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올해 국정감사에서 증인 선서를 거부했을 때, 많은 언론이 이를 단신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이 행위의 무게를 제대로 짚은 사설은 드물었다. 국정감사는 행정부만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가 아니다. 헌법 제61조는 국회가 국정 전반을 감사할 수 있다고 명시하며, 사법부 역시 그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다. 증인 선서 거부는 단순한 관례 문제가 아니라, 국회의 헌법적 권한을 사법부 수장이 정면으로 거부한 사건이다.
여기에 대법관 재제청 거부가 겹쳤다. 대통령이 추천한 대법관 후보를 대법원장이 재제청하지 않은 것은, 그 자체로 인사권 행사 방식에 관한 정치적 판단이다. 사법부가 정치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이 장면에서는 침묵했다.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중앙일보 사설이 주목한 것은 이 두 사실이 아니었다. 사설의 무게중심은 탄핵 인용 가능성이 낮다는 법리 예측과, 민주당이 정치공학적 의도로 탄핵을 꺼냈다는 동기 분석 쪽에 쏠려 있었다. 두 논거 모두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탄핵 심판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고, 정치인이 탄핵 카드를 꺼낼 때 정략적 고려가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순간, 사설이 피해 가는 것이 생긴다. 대법원장의 행동이 탄핵 논의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당한지 아닌지는 끝내 묻지 않는 것이다.
이게 프레임의 작동 방식이다. 조희대의 행동을 시비하지 않은 채, 그 행동에 반응한 여당만 조명한다. 그러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탄핵 논의 자체를 과잉 반응으로 읽게 된다.
삼권분립을 근거로 탄핵 논의에 제동을 거는 논리는 이 지점에서 뒤집힌다.
삼권분립의 핵심은 사법부를 성역으로 두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서로를 견제하게 만드는 것이다. 입법부가 사법부를 전혀 견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삼권분립이 아니라 사법부 우위체제다. 탄핵이 헌법이 입법부에 부여한 견제 수단이라는 사실, 중앙일보 사설은 이것을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는다. 반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인용 가능성과 정치공학 이야기로 논점을 옮긴다.
물론 반론은 있다. 탄핵이 헌법적으로 허용된 수단이라 해도, 그것을 남용하면 사법부 독립 자체가 흔들린다는 우려다. 탄핵 위협이 반복되면 대법원장이 정치적 눈치를 보게 된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이 반론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전제가 하나 있다. 지금의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미 정치적 눈치를 보지 않고 있어야 한다. 국감 증인 선서 거부, 대법관 재제청 거부. 이 두 사건이 현 정부와의 갈등 국면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법부 독립이 탄핵 논의 이전에 이미 정치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 사법부의 정치화를 막기 위해 탄핵 논의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화가 이미 진행 중일 때 힘을 잃는다.
중앙일보가 조희대 탄핵 논의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헌정 질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보수 진영이 사법부에 기대온 방식, 그리고 그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불안이 사설의 어조 안에 짙게 배어 있다. 법리 논쟁을 앞세우지만, 결론의 방향은 언제나 같다. 지금 이 대법원장은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민심을 제대로 읽고 있느냐는 사설의 질문은, 오히려 그대로 돌려줄 수 있다. 사법부 수장이 국회를 향해 거부권을 반복 행사하는 장면을 보면서, 독자들은 무엇을 읽을까. 그 장면을 비판하지 않고 탄핵을 꺼낸 여당만 문제 삼는 사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또 무엇을 읽을까.
민심이 어디를 향하는지, 중앙일보가 정말 읽고 싶다면 그 질문부터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