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사설 분석] 이 대통령 SNS 소통 방식, ‘모두의 대통령’에 부합하나 [출처:중앙일보]

중앙일보 사설이 2025년 5월 어느 날 “대통령 SNS 소통이 ‘모두의 대통령’ 약속에 부합하는가”를 물었다. 표면만 보면 정당한 질문이다. 대통령의 소통 방식은 언제든 공론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언론이 그것을 검증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 사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이상한 감각이 남는다. 비판은 넘쳐나는데, 정작 무엇을 어떻게 바꾸라는 말인지가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SNS를 통한 직접 소통 방침을 밝혔을 때, 참조 사례로 든 것이 멕시코 대통령의 현장 소통 방식이었다. 대통령이 중간 매체를 거치지 않고 국민에게 직접 말을 건네겠다는 취지다. 새로운 발상은 아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정치 주체로 부상한 이후,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SNS를 핵심 소통 채널로 활용해 왔다. 논란이 된 댓글 차단 조치는 욕설과 혐오 표현에 한정된 것이었고, 이는 대부분의 기관·개인 계정이 이미 적용하는 기본 운영 방침과 다르지 않다.

중앙일보 사설이 이것을 “갈라치기”라고 명명한 순간, 이 글의 논리 구조가 드러난다.

욕설 차단을 갈라치기로 부르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차단당한 욕설의 주체가 곧 배제된 국민이라는 것. 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갈라치기” 프레임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설은 이 전제를 독자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명명해버린다. 명명이 논증을 대신하는 순간이다.


프레임의 작동 방식

사설 안에는 세 개의 비판이 실려 있다. SNS 소통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 부동산 정책 실패에 대한 언급, 청년 실업 문제에 대한 지적. 이 셋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같은 지면에 배치되면서 암묵적으로 하나의 결론을 향한다. ‘이 정부는 소통도 문제이고, 정책도 실패했다.’

이 구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SNS 소통 방식을 비판하는 맥락에 정책 실패 목록을 끼워 넣으면, 소통 방식 자체가 실정의 증거처럼 읽힌다. 반대로 정책 비판의 문맥에서 소통 방식을 문제 삼으면, 정책 논의 자체가 소통 방식 논란으로 흡수된다. 어느 쪽으로 읽어도 결론은 같다. 뭘 해도 안 된다.

이것은 정치 언론이 오래 사용해 온 기술이다. 논거들이 서로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각각의 비판이 인접한 비판에 분위기를 빌려줄 뿐이다. 논증이 아니라 누적이다. 독자는 개별 비판을 검토하기 전에 전체적인 불신의 인상을 먼저 받는다.


여기서 사설을 옹호하는 쪽의 반론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중앙일보가 틀렸다고 보기 어려운 지점이 하나 있기는 하다. 대통령의 SNS 직접 소통이 기성 언론을 우회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때, 그것이 정보 환경을 어떻게 재편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 권력이 직접 생산한 서사가 검증 없이 유통될 가능성, 비판적 맥락이 차단된 채 지지층에게만 도달하는 메시지의 문제—이것은 보수 언론의 전유물이 아니라 민주주의 소통 이론의 오래된 화두다.

그러나 중앙일보 사설이 그 질문을 했는가. 아니다. 사설이 제기한 것은 “댓글 차단이 갈라치기”라는 감성적 명명이었지, 대통령 직접 소통이 만들어낼 정보 생태계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분석이 아니었다. 정당한 문제의식이 있었다면 그 방향으로 전개했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 방향으로 가면 역대 보수 정권의 언론 대응 방식을 함께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기자 질문 자체를 사전에 걸러낸 브리핑 시스템을 운영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언론과 권력의 관계는 중앙일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SNS 댓글 차단이 소통 폐쇄의 증거라면, 기자 질문 사전 필터링은 무엇이었나. 이 비교가 사설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편집의 실수가 아니라 편집의 의도다.


중앙일보가 이 사설을 쓴 시점에 더 중요한 정치 의제들이 있었다. 논평 하나의 타이밍과 의제 선택은 그 자체로 정치적 판단이다. 대통령의 SNS 소통 방식이 지금 가장 시급한 공론의 대상인가, 아니면 다른 의제를 덮거나 희석하는 데 유용한 소재인가. 이 질문에 중앙일보는 답하지 않는다.

독자는 답해야 한다.

소통 방식에 대한 비판이 진지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어떤 소통이 더 낫다는 대안, 그리고 과거와의 일관된 비교 기준. 이 사설에는 둘 다 없다. 있는 것은 프레임뿐이다.

프레임을 파는 사설과, 논증을 하는 사설은 읽히는 방식이 같아도 기능이 다르다. 전자는 독자에게 인상을 심는다. 후자는 독자에게 판단의 재료를 준다. 중앙일보 사설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그 글을 다 읽고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 안다.

남는 것이 인상이라면, 그것은 칼럼이 아니라 광고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