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이 오세훈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낭독하던 날 밤, 한동훈 전 대표 측 의원들은 “이준석은 국민의힘의 대변인이 아니다”라는 말을 흘렸다. 같은 당 소속 의원이 같은 당 전직 대표의 무죄 축하 자리에 다녀온 것에 대한 반응치고는 낯선 온도였다. 찬사가 아니라 경계였다.
이 장면 하나가 지금 국민의힘의 내부 역학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경향신문은 이 사태를 ‘이준석의 킹메이커 야망’이라는 프레임으로 독해했다. 이준석이 오세훈 옆에 붙어 한동훈을 배제한 보수 재편을 설계하고 있다는 구도다. 언뜻 그럴듯하다. 삼행시 낭독이라는 다소 연극적인 행위, 오세훈과 이준석이 각각 서울과 경기 남부를 분담한다는 언론의 역할 배분 서사, 거기에 친한계의 거부감까지. 재료가 갖춰져 있으니 그림이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킹메이커 프레임은 실제로 무엇을 말해주는가.
킹메이커란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타인을 왕좌에 올리는 사람이다. 그 정의대로라면, 이준석이 킹메이커라는 주장은 그가 대선 본선 경쟁을 스스로 접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런데 이준석은 지금도 자신을 대선 주자로 공공연히 위치시킨다. 그가 경기 남부 기반을 다진다면 그건 오세훈을 위한 조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지분 확보다. 킹메이커와 왕 후보 사이에서 어느 쪽도 아닌 채로 줄을 타는 것, 그게 지금 이준석의 실제 포지션에 더 가깝다.
경향신문의 프레임은 이 애매함을 ‘야망의 이야기’로 납작하게 만든다. 야망을 서사의 핵심으로 놓으면 이준석은 음모를 꾸미는 기획자가 되고, 오세훈은 그의 말을 탄 말이 된다. 그러나 오세훈은 서울시장 3선 경험에 무죄 판결까지 받은 독자적 정치인이다. 그가 누군가의 킹메이킹 대상으로 수동화되는 것은 그 자체로 현실과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삼행시 한 편, 만찬 한 자리로 보수 재편의 그림이 확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지금 국민의힘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재편이라기보다 분열의 관리다. 한동훈-이준석-오세훈 사이에는 연대보다 각자도생의 원심력이 더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준석이 오세훈 축하 자리에 간 것은 연대의 신호라기보다, 한동훈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행위였다. 친한계가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도 거기 있다. 저 자리가 오세훈-이준석의 연합 선언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배제된 자리라는 것이 가시화됐기 때문이다.
보수 야권이 공통의 적(민주당 정부)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원심력이 강하다는 것은, 구심점의 부재를 의미한다. 한동훈이 당 대표직을 잃은 뒤 국민의힘에는 누구도 ‘차기 대선 후보’로 내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그 공백 안에서 각자가 자기 지분을 쌓는 중이다. 삼행시는 그 경쟁의 한 장면이지, 새 판의 청사진이 아니다.
경향신문의 프레임이 놓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이 갈등의 수혜 구조다. 보수 진영이 계파 싸움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동안, 이재명 정부는 국정 어젠다를 다듬을 시간을 번다. 이건 음모론이 아니라 정치의 기본 역학이다. 야당이 내부 경쟁에 집중할수록 대안 세력으로서의 응집력은 약해진다. 유권자 입장에서 야당이 무엇을 반대하는지는 알겠는데,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가 흐릿해지는 것이다.
경향신문의 ‘킹메이커 이준석’ 프레임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정치 드라마를 제공하지만, 독자에게 필요한 건 드라마의 줄거리가 아니라 이 갈등이 실제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독해다. 친한계 대 반한계의 계파 갈등이 봉합 가능한가, 불가능하다면 분당 혹은 신당 창당으로 이어질 에너지가 축적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가 2026년 이후 선거 지형을 어떻게 바꾸는가. 이 질문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삼행시 한 편을 킹메이커 야망의 증거로 읽는 것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방법이지 정치를 분석하는 방법이 아니다.
이준석은 지금 킹메이커가 되려는 게 아니다. 아직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왕이 될 수도 있는 다른 사람 옆에 서서 지분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의 차이는 크다. 그리고 그 차이를 뭉개는 프레임이 계속 소비될수록, 국민의힘의 실제 진단은 늦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