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지난주 사설에서 민주당을 “입법 독재”로 규정했다. “다수 의석으로 동료 의원 입틀막”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그 사설이 겨냥한 것은 두 가지였다. 주진우 의원 발언을 문제 삼은 민주당의 움직임, 그리고 이진숙 의원의 방송 국정감사 참여를 제한하려 한 시도. 사설은 이 두 사안을 하나의 서사로 묶어 “민주당이 야당의 입을 틀어막는다”는 그림을 그렸다.
이 프레임을 그냥 두면 안 된다.
주진우 의원이 SNS에 공유한 문구는 “이재명을 끊을 때”였다. 조선일보는 이것을 “강도 높은 비판”이라고 표현했다. 비판의 자유를 이야기하려면, 그 비판이 어느 선에 있는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 여당 대통령을 향한 반대 의견이라면 정치 발언의 범주 안에 있다. 그런데 “끊을 때”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뉘앙스, 즉 지금 탄핵 정국과 계엄 수습 국면에서 야당 의원이 그 문구를 선택했다는 맥락, 사설은 이것을 통째로 생략한다. 발언의 ‘존재’만 보도하고 발언의 ‘무게’는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식이다.
사설이 이 생략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맥락이 붙으면 “표현의 자유”라는 방패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이진숙 의원 문제는 더 명확하다.
이진숙 의원은 방통위원장 재직 당시 공영방송 이사 선임을 강행해 탄핵 소추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 인물이 방송 관련 국정감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한 ‘야당 의원의 국감 참여’가 아니다.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내린 결정에 대한 감사에, 본인이 질의자로 참여하는 구조다. 이해충돌이냐 아니냐는 쟁점을 떠나서, 이 구조가 상식적으로 어색하다는 판단 자체를 조선일보 사설은 없는 것으로 처리한다. 그냥 “야당 의원의 감사 참여를 막았다”고만 쓴다.
이렇게 배경을 지우면 어떤 조치든 탄압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
조선일보 사설이 설계한 프레임의 구조는 이렇다. 먼저 국민의힘 의원들이 현재 받고 있는 정치적 압박을 “야당 탄압”으로 정의한다. 그 다음 민주당이 취하는 모든 조치를 “다수결 횡포”로 이름 붙인다. 여기서 계엄이라는 사건 자체는 사라진다. 원인이 지워지고 결과만 남는다.
이것은 서사 조작이다.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구조적 왜곡이다.
계엄 이후 국민의힘 의원들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다수당의 횡포”가 아니라 계엄에 동조하거나 침묵한 것에 대한 정치적 책임 요구다. 그 책임 요구가 모두 정당하냐 아니냐는 사안별로 따질 수 있다. 주진우 의원 발언의 징계 수위가 적정한지, 이진숙 의원 배제의 근거가 규정상 충분한지, 이런 개별 판단은 열려 있다. 그런데 그 개별 판단을 통째로 “민주주의 탄압”으로 뭉쳐버리는 것은 논증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지금, 계엄이 만들어낸 정치적 결과를 민주당이 만들어낸 탄압으로 교체하려 한다.
“그래도 다수 의석으로 밀어붙이는 건 문제 아니냐.”
이 반론은 들어볼 만하다. 실제로 민주당이 수적 우위를 앞세워 속도전을 벌이는 장면들이 없지 않다. 그 우려가 완전히 근거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다수 의석 자체가 문제라면, 그 의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까지 함께 봐야 한다. 2024년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압도적 의석을 준 것은, 당시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계엄 이후 그 민의는 더 선명하게 확인되었다. 민주당이 그 의석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입법 독재”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이기도 하다. 다수결이 문제가 되려면 절차적 위반이 있거나 소수 권리를 침해하는 구체적 사례가 있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은 그 사례를 제시하지 않는다. “다수가 밀어붙인다”는 인상만 있고 증거는 없다.
인상과 증거는 다르다.
이 사설이 노리는 독자는 계엄 이후 피로감을 느끼는 중도층이다. “이제 좀 그만해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 그 피로감에 “맞아, 민주당이 독재하고 있어”라는 언어를 입히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 기술을 수십 년째 써왔다. 원인을 지우고 반응만 남긴다. 가해를 지우고 피해를 남긴다. 그리고 그 남겨진 장면에 ‘독재’라는 라벨을 붙인다.
계엄을 일으킨 것은 민주당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