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언론의 무지·왜곡, 한국 반도체산업 위험하게 만든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사설에서 단호하게 선언했다. “주 52시간 규제가 반도체 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동아일보도 거의 같은 날, 거의 같은 논리로 받아쳤다. 두 신문이 이렇게 박자를 맞출 때는 보통 두 가지 중 하나다. 정말 중요한 진실을 짚었거나, 아니면 누군가 흘린 프레임을 동시에 받아 적었거나.

이번엔 후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RBA(Responsible Business Alliance, 글로벌 책임경영 연합)의 정식 회원사다. RBA 행동규범은 주당 근무시간 상한을 60시간으로 못 박는다. 애플, 구글, 인텔이 공급망 전체에 이 기준을 강제 적용한다. 삼성전자가 자사 협력업체에 배포하는 행동규범에도 같은 내용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글로벌 입찰 서류 자체를 제출할 수 없다. 퇴출이 자동으로 작동하는 구조다.

보수 언론이 요구하는 것은, 국내 법정 근로시간 상한을 주 52시간 위로 올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나. 국내 기업이 RBA 기준 60시간 위로 노동자를 실제로 굴리기 시작하는 순간, 애플 공급망 심사에서 탈락한다. 구글 협력사 자격을 잃는다. 조선일보가 “경쟁력을 살리자”며 요구하는 바로 그 조치가, 반도체 기업을 글로벌 공급망 바깥으로 밀어내는 직접 경로다.

이걸 보수 언론이 몰랐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게 더 심각한 문제다.

반론을 먼저 세워보자

“그래도 연구개발 인력만큼은 예외를 둬야 하지 않나.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가 마감 앞두고 주 60시간도 못 일하게 막는 건 지나친 규제 아닌가.”

이 반론은 겉보기엔 합리적이다. 실제로 반도체 업계에서 일하는 고숙련 엔지니어들이 자발적으로 더 일하고 싶을 때 법이 발목을 잡는다는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한국 현행법에는 이미 고소득 전문직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논의가 수년째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

하지만 보수 언론의 사설이 겨냥한 건 그 정교한 제도 설계가 아니었다. “52시간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은 특정 직군을 위한 예외 설계 요구가 아니라, 규제 완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주장이다. 제도의 세부 설계를 논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노동시간 상한 해제 쪽으로 여론을 끌고 가려는 프레임이다. 반도체를 방패막이로 쓴 것이다.

반도체 엔지니어를 진심으로 걱정했다면, RBA 기준과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지부터 따졌어야 한다. 그 언급이 두 신문의 사설 어디에도 없었다.


반도체 산업의 진짜 위기 요인이 무엇인지는 업계가 이미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첫째는 RE100 대응 실패다. 애플을 비롯한 주요 고객사들은 공급망 전체의 재생에너지 전환을 압박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RE100 이행 속도는 TSMC나 인텔에 비해 현저히 뒤처져 있다. 이 격차가 공급망 탈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둘째는 인재 이탈이다. 한국 반도체 핵심 인력의 이직 경로를 보면 미국과 대만으로 향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를 물으면, 노동시간이 너무 짧아서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보수 언론이 설정한 프레임, 즉 “규제가 반도체를 죽인다”는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진짜 위기를 완전히 지운다. 주 52시간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논의의 무게중심이 RE100과 인재 유출에서 노동규제로 옮겨간다. 이것이 프레임의 기능이다. 불편한 진짜 문제를 흐리는 것.

삼성전자가 경쟁에서 뒤처지는 이유를 엔지니어들이 너무 쉬어서라고 설명하는 건, 집에 불이 났는데 문 잠금장치가 문제라고 진단하는 것과 같다. 틀렸다기보다,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다.


더 짚어야 할 게 있다. 이 프레임이 왜 지금 나왔는가.

윤석열 정부 시절 추진하다 좌절된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은 당시 여론의 강한 반발로 후퇴했다. 보수 언론은 그 정책 방향을 포기하지 않았고, 반도체 위기론이 불거질 때마다 같은 프레임을 재활용한다. 반도체는 여기서 논리가 아니라 장치로 쓰인다. 반도체 위기가 심각할수록, 그것을 규제 탓으로 돌리는 이야기의 설득력이 올라간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계산이 반도체 산업에 실제로 해롭다는 점이다. 잘못된 진단은 잘못된 처방으로 이어지고, 잘못된 처방은 환자를 더 아프게 한다. 언론이 권력을 견제하는 것보다 특정 정책 방향을 뒷받침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쓸 때, 피해는 그 언론이 보호한다고 주장하는 산업에 고스란히 돌아간다.

반도체를 살리고 싶다면, 52시간이 아니라 RE100 이행 로드맵을 따지고, 핵심 인재가 왜 한국을 떠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 질문을 회피하게 만드는 프레임이 지금 보수 언론 지면을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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