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버블’ 유시민, 김어준에 속았다”

2025년 어느 오후, 오마이TV 생방송 전화 연결에서 비교적 평범한 이름의 시민 한 명이 말했다. “유시민이 김어준한테 속았어요. 그리고 저도 속았고요.” 방송 진행자가 잠깐 멈칫한 것 같았다. 그 시민은 송파에 산다고 했다.

논객이 아니었다. 전직 의원도 아니었고, 구독자 수십만을 가진 유튜버도 아니었다. 그냥 오래 진보 콘텐츠를 봐온 시청자였다. 그 사람이 방송에 전화해서 꺼낸 단어가 “정치 버블”이었다.

이 장면을 보수 언론이 그냥 흘려보낼 리 없다. 조선이든 중앙이든 이런 장면은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친명 팬덤·편향 방송 비판” 식으로 받아서 써먹기 좋은 소재다. 실제로 일부 매체는 비슷한 흐름의 기사를 쓴다. 그런데 그 프레임이 정확히 무엇을 놓치는지가 오늘 하고 싶은 얘기다.


보수 진영이 “진보 내부 분열”이라고 읽을 때, 그들이 전제하는 건 하나다. 비판의 주어가 외부에 있다는 것. 즉, 팬덤이 문제고, 유시민·김어준이 문제고, 그것을 믿은 진보 유권자 전체가 기만당한 집단이라는 서사다. 이 구도에서 국민의힘과 보수 언론은 언제나 진실을 먼저 알고 있던 쪽으로 설정된다.

그런데 송파 시민이 실제로 한 말은 그 구도와 전혀 달랐다.

그 사람이 비판한 첫 번째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왜 나는 반대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유시민을 욕한 것도, 김어준의 방송을 해체하자고 외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특정 채널의 논리 안에 갇혀 있었다는 것, 그 안에서 반대 정보를 걸러냈다는 것을 먼저 인정했다. 그게 “정치 버블”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된 것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외부를 비판하는 것과 자신의 인식 구조를 비판하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다. 전자는 누군가를 속인 사람을 찾는 것이고, 후자는 왜 내가 속기 좋은 상태였는지를 묻는 것이다. 보수 진영이 반복해온 “친명 팬덤 비판”은 철저하게 전자다. 진보 유권자를 주체 없는 피해자로 설정해야 그 서사가 완성된다. 그런데 송파 시민의 발언은 그 서사가 작동하는 것을 스스로 막는다. 자신을 피해자로 놓지 않았으니까.


유시민이라는 이름을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는 2010년대 후반부터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통해 진보 담론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해왔다. 알릴레오, 노무현재단 유튜브 채널, 그리고 각종 대담 방송. 그 콘텐츠들이 형성한 정치적 감각의 틀이 있었다. 김어준도 마찬가지다. 딴지일보 시절부터 쌓인 신뢰가 뉴스공장과 다양한 방송으로 이어졌고, 그 신뢰는 팩트 검증보다 먼저 작동하는 경향이 생겼다.

문제는 콘텐츠의 질이 아니다. 그 채널들이 형성한 세계관 안에서, 반론이 거의 기능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적으로 분류되거나,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처리됐다. 이건 보수 진영의 미디어 생태계가 똑같이 겪고 있는 문제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강화하는 확증 편향 구조 안에서, 진보도 보수도 자기 세계관만 반복 소비하는 회로를 갖게 됐다.

그 사실을 진보 진영의 시민 한 명이, 보수 언론의 비판이 아니라 자기 경험에서 꺼낸 것이다.


그러면 이걸 진보의 위기로 봐야 하나.

나는 반대로 본다. 자기 비판의 언어를 가진 진영이 장기적으로 더 단단해진다. 국민의힘이 지난 몇 년간 이준석 파동, 윤석열 탄핵 정국, 내부 노선 갈등을 거치면서 보여준 것은 자기 성찰의 부재였다. 갈등이 생기면 탓할 외부를 찾거나, 끼리끼리 논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게 지금 국민의힘의 위치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유다.

진보 유권자 한 명이 “나는 버블 안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반대 방향의 운동이다. 작고 평범한 자성이지만, 정치적으로 건강한 방향은 거기에 있다.

물론 반론도 있다. 이런 자성이 자칫 보수 진영의 공격에 빌미를 줄 수 있고, 실제로 그 발언은 맥락과 무관하게 잘라서 쓰인다. “진보 내부에서도 인정”이라는 식으로. 그 위험은 실재한다. 그러나 그 위험 때문에 자기 성찰을 억제하는 것은 더 나쁜 선택이다. 그건 정확히 “비판받을까봐 비판을 내재화하지 않는” 보수 진영의 패턴이다.


오마이TV는 진보 성향의 미디어다. 그 채널의 생방송에 시청자가 전화해서 “우리가 버블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그 방송이 그 발언을 자르지 않고 내보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데이터다.

공론장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정치부 기자의 단독 보도에서인가, 유명 논객의 유튜브 채널에서인가. 어쩌면 가장 불편한 진실은, 한 명의 시민이 방송에 전화해서 꺼낸 말 한 마디가 정교하게 편집된 칼럼 수십 편보다 더 정확하게 지금의 문제를 짚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보 미디어 생태계가 다음 단계로 가는 데 실제로 필요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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