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유시민과 싸워야 할 때.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은 달랐다. 그 추위 속에서 사람들이 손에 든 건 촛불이었고, 입에 담은 건 민주주의였다. 유시민의 목소리는 분명했고, 김어준의 팟캐스트는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들었다. 그 언어는 강렬했고,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그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읽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지금은 2025년이다.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유시민과 싸우자는 말을 꺼내는 순간, 진보 진영 안에서 즉각적으로 튀어나올 반응이 있다. “지금이 때냐”, “결국 이게 보수 언론의 논리 아니냐”, “편 가르기 말고 단결하라.” 이 반응은 예측 가능하고, 그 예측 가능성 자체가 이미 문제다. 비판에 대한 면역 반응이 너무 정교하게 훈련되어 있다. 그 훈련의 교관이 누구였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유시민의 문제는 그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언제나 옳았다는 게 문제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진보 언론과 팟캐스트, 유튜브를 넘나들며 정치 해석의 권위를 쌓았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어떤 사건이 중요하고 어떤 사건이 과장인지, 그 기준을 설정하는 사람이 유시민이었다. 진보 진영의 의제 설정이 사실상 그의 해석을 경유했다. 그리고 그 구조는, 적어도 이 진영 내부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도전을 받지 않았다.

문제는 그 사이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이후 아무것도 새로 자라지 않았다

노무현 이후 민주 진영은 스스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지 못했다. 문재인은 노무현의 정서적 계승자였고, 이재명은 그 이후의 불가피한 선택에 가까웠다. 각 전환점에서 진영은 “다음 세대의 정치 언어”를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 대신 유시민과 김어준의 언어가 빈 공간을 채웠다. 그 언어는 2002년과 2016년 사이에 가장 선명하게 작동했던 언어다.

그 언어의 핵심 문법은 ‘적의 설정’이다. 조선일보, 검찰, 재벌, 그리고 그 포위망을 뚫는 정의로운 우리. 이 구도는 촛불 이전까지는 강력했다. 실제로 그 구도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현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촛불 이후 집권한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그 언어는 집권 세력을 수호하는 방어막으로 전용됐다. 적을 설정하는 문법이 내부 비판을 차단하는 문법으로 슬그머니 교체됐다. 비판하면 “적의 편”이 되고, 불편한 사실을 꺼내면 “분열을 조장”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 논리를 처음 들었을 때 이상하다고 느꼈다면, 당신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2030 세대가 민주 진영을 등진 건 보수 언론에 세뇌돼서가 아니다. 그들은 말과 행동 사이의 간극을 눈으로 확인했다. 집값, 불평등, 기회의 차단. 그 불만이 표출될 때 돌아온 건 공감이 아니라 “지금이 때냐”는 제지였다. 그 제지의 목소리가 누구의 언어를 입고 있었는지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비판이 배신으로 둔갑하는 구조

여기서 진짜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유시민이나 김어준을 비판하는 것이 왜 그토록 정치적 비용을 치르는 일이 됐는가.

그 답은 아마도, 이 진영 안에서 비판의 대상이 인물이 아니라 진영 자체와 동일시되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훈련돼왔기 때문일 것이다. 특정 인물에 대한 비판이 곧 진영에 대한 공격으로 처리될 때, 그 진영은 자기 교정 능력을 잃는다. 이건 우파 진영에 대해서는 진보가 매우 날카롭게 지적해온 병리다. 그런데 그 병리가 어느 순간 이쪽 안에도 들어와 있었다.

물론 반론은 있다. 유시민과 김어준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실제로는 보수 논리의 외피를 빌리거나, 진영 교란을 목적으로 한다는 반론. 그 반론은 완전히 틀리지 않는다. 조선일보가 유시민 비판 기사를 쓸 때 그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반론이 작동하는 방식을 잘 봐야 한다. “비판하는 사람의 동기를 의심하라”는 논리는, 비판 자체를 원천적으로 무력화하는 장치다. 내용을 반박하는 게 아니라 발화자를 의심함으로써 논의 자체를 닫아버린다. 이건 진보가 수십 년 동안 싸워온 논리, 즉 “빨갱이 소리 하지 마라”는 구도와 형식이 동일하다. 다만 방향이 다를 뿐이다.


진보 기득권이라는 말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의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진보 진영이 만들어온 것들, 노동 권리, 표현의 자유, 소수자 보호, 이것들은 지켜야 할 가치다. 하지만 그 가치를 지켜온 사람들의 해석 독점권은 가치와 별개다.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석을 독점하는 구조는 깨야 한다.

민주주의는 특정 해석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 위에 서 있다.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원했던 것도, 유시민의 해석을 구독하는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는 권리였을 것이다.

그 권리를 지금 진보 진영 내부에서 행사하는 것, 그게 배신이 아니다. 그게 애초에 우리가 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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