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닉스는 왜 시기를 빼놓았을까

2025년 5월 13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나란히 전북 새만금을 찾았다.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 선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장면이었고, 정부는 그 장면을 최대한 활용했다. 발표된 투자 규모는 삼성 500조, SK 300조, 합계 800조 원. 숫자만 보면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의 1.3배에 달하는 천문학적 약속이다.

MOU 체결문 어디에도 “몇 년까지”라는 문장은 없었다.

공시 서류에는 “시장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는 문구가 박혔다. 이 문구는 법적 면책 조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약속의 성격을 정확하게 규정한다. 시기가 없는 투자 약속은 투자 계획이 아니라 투자 의향이다. 의향은 철회해도 위약금이 없다.

기업이 원한 것은 따로 있었다

보도 대부분은 “800조 투자”에 방점을 찍었다. 그런데 이번 협약의 실질적인 교환 구조를 들여다보면, 무게중심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성과 SK가 진짜 원하는 것은 경기도 용인 메가클러스터다. 삼성 용인 클러스터는 세계 최대 규모의 파운드리 단지를 목표로 설계되었고, SK 역시 이천·용인 축을 중심으로 HBM 생산 라인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 두 사업 모두 전력·용수·도로 등 국가 인프라 선투자 없이는 착공조차 불가능하다.

이번 협약에서 정부가 기업 측에 건넨 것은 바로 그 인프라 구축 일정의 조기 집행이었다. 최대 12년을 앞당기기로 했다는 내용이 협약문에 담겼다. 즉, 기업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을 이번 협약을 통해 이미 확보했다. 호남 투자는 그것을 얻어내기 위한 교환 조건으로 제시된 셈이다.

이 구도를 뒤집어 읽으면 이렇게 된다. 정부는 용인 인프라를 선투자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기업은 호남에 언젠가 투자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실행 의무가 비대칭적이다.

“그래도 선언 자체가 중요하다”는 반론

물론 이 분석에 대한 반론은 존재한다. 완전한 허구라면 두 재벌 총수가 직접 나타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기업 오너가 현장에 서는 것 자체가 일종의 담보이고, 정치적 신뢰 자본을 소비하는 행위라는 시각도 있다. 반도체 산업은 어차피 장기 계획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시기를 못 박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 논리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10대 그룹은 향후 5년간 1,00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찬가지로 시기와 조건은 모호했다. 그 이후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업황 악화를 이유로 설비투자를 대폭 줄였고, 그 결정을 두고 정부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시장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는 조항이 정확하게 작동한 것이다.

패턴은 반복된다. 정권 초·중반부에 대규모 투자 발표가 나오고, 업황이 꺾이거나 정치적 필요가 사라지면 조용히 축소되거나 연기된다. 그 과정에서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숫자는 뉴스 사이클 안에서 소비되고, 현장 사진은 정부 홍보물에 들어간다.

호남이 받은 것은 무엇인가

이 대목에서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한다. 이번 협약의 구도는 사실상 호남 지역의 정치적 기대를 동원해 기업에게 용인 인프라 조기 집행이라는 실질적 이익을 선물한 것 아닌가.

800조 원이라는 숫자는 전북·전남 주민들에게 당연히 매력적으로 들린다.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서면 일자리와 지역 경제가 바뀐다는 기대는 충분히 합리적이다. 하지만 지금 그 기대에 대응하는 실체는 MOU 한 장이고, 그 안에 일정은 없다.

정부 임기는 5년이다. 반도체 업황 사이클은 그보다 짧게 돌아온다. 이 정부가 임기 안에 호남 클러스터의 착공을 볼 수 있을지조차 현시점에서는 불확실하다. 반면 용인 인프라 조기 집행은 이미 정부 예산과 일정에 반영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어느 쪽이 더 구체적인 약속인지는 명백하다.

이것이 지역 균형 발전 정책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균형 발전은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는 것이지, 수도권 투자를 확보하기 위한 레버리지로 비수도권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한 줄로 압축하면 이렇다. 기업은 원하는 것을 받았고, 정부는 쓸 사진을 얻었으며, 호남은 숫자를 받았다. 숫자에는 날짜가 없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