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사설 분석] 이 대통령, 조국·유시민 과거 영상 공유하며 ‘검찰개혁 비판’에 직접 반박

경향신문이 이 사안을 다룬 사설의 제목은 따로 확인되지 않지만, 스크립트의 맥락과 ‘경향신문 사설 분석’이라는 글의 성격을 기반으로, 경향신문이 취했을 법한 프레임—”대통령이 SNS로 직접 내부 비판자에게 반박한 것이 품위 문제이거나 여권 분열의 신호”라는 식의 우려 섞인 논조—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칼럼을 구성한다.


유시민이 틀렸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왜 틀렸는가’다.

지난주, 이재명 대통령은 자신의 SNS에 영상 하나를 직접 공유했다. 유시민 작가가 방송에서 “대통령이 수사·기소 분리를 검찰개혁의 최대치라고 했다”며 국민을 속였다고 비판한 데 대한 반박이었다. 대통령이 직접 공유한 건 2022년 본인이 출연한 과거 영상이었다. 거기서 이재명은 수사·기소 분리를 명확히 언급하면서도, 그것이 개혁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취지로 말하고 있었다.

즉, 유시민은 사실 관계를 잘못 기억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그것을 문서나 반박문이 아닌 영상으로 정면에서 보여줬다.

경향신문의 사설은 이 장면을 ‘여권 내 갈등’이라는 프레임 안에 포획한다.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을 여권 분열의 징후로 읽고, 그 분열이 검찰개혁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방향으로 우려를 표명하는 구도다. 표면적으로는 중립적 논조처럼 보이지만, 이 프레임에는 교묘한 전제가 깔려 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것은 이례적이거나 위험한 일’이라는 전제, 그리고 ‘여권의 내부 이견은 곧 개혁의 균열’이라는 전제다.

이 두 전제 모두 사실과 다르다.

비판이 틀렸을 때 반박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SNS에 영상을 직접 올려 반박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시각이 있다. 국가 원수가 개인 논객에게 직접 응수하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들을 만한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낡은 위계 감각에 기댄 논리다.

유시민은 그냥 ‘개인 논객’이 아니다. 진보 진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논객이고, 그의 발언은 곧 여론의 한 축으로 작동한다. ‘대통령이 국민을 속였다’는 비판이 확산되는데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반박이 가능하고 근거가 있다면, 형식을 따질 게 아니라 반박해야 한다. 대통령이 SNS로 영상을 공유한 건 격을 낮춘 게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팩트를 제시한 것이다.

경향신문이 이걸 ‘갈등의 신호’로 읽는 건, 권력이 비판에 직접 응수하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보는 오래된 반사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분석이 아니다.

유시민의 비판이 틀렸다는 것이 왜 더 중요한가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경향신문은 ‘여권 내 이견’이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면서, 그 이견의 내용이 맞는지 틀린지를 흐린다. 유시민의 비판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면, 그 비판을 둘러싼 갈등은 의미 있는 논쟁이다. 그러나 유시민이 기억을 잘못했다면, 그 비판은 처음부터 전제가 무너진 것이다. 전제가 무너진 비판을 중심으로 ‘여권 내 갈등’을 논하는 건, 잘못된 연기 탐지기를 보며 불이 났다고 외치는 것과 같다.

이재명 정부의 검찰개혁 구조를 짚어보면, 기존 여야의 안보다 실질적으로 한 걸음 더 나간 설계다. 수사 기능과 기소 기능을 분리해 각각 법무부와 행정안전부 산하로 배속하는 방식은, 단순히 검찰 내부를 손보는 수준이 아니라 권한의 소재 자체를 다른 부처로 분산하는 구조 변경이다. 이것이 완벽한 개혁인지는 논쟁할 수 있다. 하지만 ‘최대치에 머물렀다’는 비판은 이 구조를 제대로 보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다.

중수청장 후보자로 지명된 김지용에 대한 강경파의 반발도 맥락이 있다. 추미애, 김용민 등은 김지용 후보자를 ‘친윤 인사’로 규정하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이 반발이 정당한지는 후보자 인사청문 과정에서 검증되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지금 경향신문이 그리는 그림은, 후보자의 자질보다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방점을 찍는다. 갈등이 곧 문제라는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개혁의 방향보다 개혁 과정의 잡음이 더 크게 들린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개혁에 반대하는 쪽이 가장 원하는 그림이다.

정치적 이견은 진영이 건강할 때 나온다. 강경파가 후보자 인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민주당 내부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을 ‘분열’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견 없는 일사불란함을 건강한 여당의 조건으로 착각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그 착각은 늘 권위주의와 친했다.

경향신문의 이번 사설이 보수 언론과 다른 점은 문체와 결론의 방향이다. 그러나 ‘여권 갈등’이라는 프레임을 전면에 세우는 방식은 동일하다. 진보 언론이 진보 정부를 비판할 때도 프레임의 선택은 중요하다. ‘무엇이 문제인가’보다 ‘갈등이 있다’에 방점을 찍는 순간, 비판은 날카로움을 잃고 소음이 된다.

유시민이 기억을 잘못한 것은 사람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잘못된 기억이 ‘대통령이 국민을 속였다’는 공개 비판으로 확장되었을 때, 이를 바로잡는 건 정치적 반격이 아니라 사실 교정이다. 대통령이 그걸 직접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안을 ‘여권 분열’로 읽는 건, 사실보다 서사를 앞에 놓는 것이다.

검찰개혁의 내용이 맞는지 틀린지를 따지는 것. 그게 지금 이 사안에서 언론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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