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도쿄와 요코하마를 집어삼킨 관동대지진의 잿더미 속에서 일본 자경단은 단 한 가지 기준으로 사람을 가려냈다. “조센징처럼 생겼느냐.” 인상착의, 발음, 눈매. 그것으로 충분했다. 얼굴이 죄목이 됐고, 죄목은 즉결처형으로 이어졌다. 학살된 조선인의 수는 최소 수백, 최대 수천으로 추산된다. 역사학계가 아직도 정확한 숫자를 두고 씨름하는 건, 학살이 워낙 조직적이고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그 자경단원들도, 틀림없이, 자신이 자유롭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이 배우 유해진의 사진을 가리켜 “북한상”이라고 한 건 지난 6월의 일이다. 논란이 일자 의원실이 내놓은 해명은 “표현의 자유”였다. 그게 전부였다. 사과도, 철회도 없이, 개념 하나로 방패를 삼은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지, 헌법 교과서가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 읽어보면 이렇다. 이 자유는 본래 권력에 저항하는 무기였다. 국가가 “이렇게 생각하라”고 강제할 때, 개인이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버틸 수 있는 권리. 언론이 권력의 비리를 폭로할 때, 정부가 그 입을 막지 못하게 하는 방패. 표현의 자유는 위를 향하는 자유다.
주진우 의원의 발언은 반대 방향을 향한다. 국회의원이라는 공권력의 지위에서, 아무 정치적 발언도 한 적 없는 배우를 향해, 그의 얼굴 생김새가 이념의 증거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건 자유의 행사가 아니라 낙인의 찍기다. 권력이 개인에게 이름표를 붙이는 행위이고, 그 이름표가 “북한”이라면 그 함의는 명확하다. 적, 혹은 적에 동조하는 자.
“북한상”이라는 말이 단순한 실언이나 농담으로 소비되기 어려운 이유는 그 말이 놓인 문법 구조 때문이다. 이 말은 전제를 깔고 있다. 북한 사람은 특정하게 생겼다는 것, 그 생김새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생긴 얼굴은 어딘가 의심스럽다는 것. 세 개의 전제가 모두 성립해야 “북한상”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세 개 모두 틀렸다.
북한에만 있는 얼굴형 같은 건 없다. 생물학적으로도, 민족지학적으로도. 그러나 “북한상”이 통용되려면, 그걸 보는 사람이 암묵적으로 동의해야 한다. 그 동의가 쌓이면 무엇이 되는지, 1923년이 이미 보여줬다. “조센징처럼 생겼다”는 말도 처음엔 누군가의 즉흥적인 인상 평이었을 것이다.
반론이 있다는 걸 안다. 설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의 말 한마디가 그 정도의 위험을 가지냐고. 관동대지진과 지금을 동일선상에 두는 건 과도한 비약 아니냐고.
과도하지 않다. 위험은 대개 갑자기 오지 않는다. 말이 먼저 오고, 구분이 오고, 낙인이 오고, 그다음이 온다. 그 순서가 느리게 진행될 때 우리는 각 단계를 독립된 사건으로 처리하고 연결을 놓친다. “북한상”이라는 말은 그 순서의 첫 번째 단계다. 얼굴로 이념을 판별할 수 있다는 관념이 공론장에 진입하는 단계. 거기서 막지 않으면 다음 단계는 더 자연스러워진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 말이 국회의원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일반 시민이 “저 배우 왠지 북한 사람처럼 생겼다”고 말한다면, 그건 편견이고 교정의 대상이지만, 공적 권력의 언어는 아니다. 국회의원은 다르다. 그 말은 헌법기관의 공식 발화다. 국회의원이 누군가의 외모를 이념의 증거로 지목하는 순간, 그 말에는 제도적 무게가 실린다. “저 사람 얼굴을 봐라, 북한 냄새가 나지 않느냐”는 발언이 입법부 의원의 언어가 될 때, 그건 단순한 의견 개진이 아니다. 특정 유형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정치적 의심의 공식화다.
유해진은 물론 어떤 배우도, 어떤 시민도, 자신의 얼굴 때문에 이념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 자명한 사실을 국회의원이 “표현의 자유”로 뒤집으려 할 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인가가 아니다.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주진우 의원의 프레임을 수용한 것이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얼굴로 사람을 판별하는 언어를 국회의원이 구사할 때, 그 의원은 자신이 대표해야 할 국민을 누구로 상정하고 있는가.
“북한상”처럼 생기지 않은 사람들만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