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사설 분석] 李정권 사람들에게 국정 과제는 ‘조희대 때리기’밖에 없나

조선일보가 5월 사설에서 이재명 정부를 향해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국정 과제가 조희대 때리기밖에 없냐.”

선명하고 자극적이다. 그런데 질문이 선명할수록 그 질문이 전제하는 것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이 사설의 구조는 간단하다. 여당이 조희대 대법원장을 겨냥하는 것을 “때리기”로 규정하고, 그 에너지가 민생으로 가야 할 국정 동력을 소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읽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인상을 심어준다. 민주당은 민생은 팽개치고 사법부 흔들기에 열중하는 정권이라고.

그런데 이 프레임은 두 가지를 동시에 숨긴다.

하나는 조희대 대법원장을 둘러싼 논란의 실질적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때리기”라는 단어가 수행하는 기능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2023년 12월 임명됐다. 전임 김명수 체제가 남긴 대법관 구성이 진보 편향이라는 비판 속에 윤석열 정부가 선택한 인물이다. 취임 이후 대법원은 굵직한 사건에서 잇따라 논란이 되는 판단을 내렸다. 이재명 전 대표 관련 선거법 사건의 파기환송, 쌍방울 사건 관련 재판 속도, 노동·환경 분야 판결 방향. 비판은 단순히 “야당 출신 사법부 수장”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과 결과물에 대한 문제 제기다.

더불어 사법부의 재판 지연 문제는 조희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수년간 누적된 구조적 불신을 담고 있다. 1심이 나오기까지 2, 3년을 기다리는 현실, 특정 사건에서만 유독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속도, 대법관 구성의 편향성 논쟁. 이건 사법부 전반에 대한 민주주의적 요구가 응축된 지점이다.

조선일보는 이 복잡한 지형을 “때리기”라는 두 글자로 납작하게 눌러버렸다.

“때리기”는 상대방의 행위를 사전에 부당한 것으로 규정하는 단어다. 문제 제기, 비판, 견제가 아니라 “때리기”로 부르는 순간, 독자는 이미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받아들인다. 사법부가 피해자고 정치권이 가해자라는 구도. 그러면 이후의 모든 논의는 이 틀 안에서만 움직이게 된다.

이것이 조선일보 사설이 하는 일이다. 논쟁의 내용이 아니라, 논쟁 자체를 성립 불가능하게 만드는 언어 설계.


그렇다면 반론을 직접 끌어오자.

“사법부 문제가 실재하더라도, 집권 초반 정권이 에너지를 거기에 쏟는 건 우선순위 문제 아니냐.”

이건 꽤 정직한 반론이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경제 회복, 가계부채, 저출생 대응 등 산적한 민생 과제를 안고 있다. 사법 개혁과 민생이 동시에 가능한 자원이 정부에 있느냐는 질문은 가볍지 않다.

그러나 조선일보 사설이 이 반론을 쓰는 방식과, 실제 반론의 무게는 다르다. 조선일보는 사법 개혁 자체가 “국민 삶과 무관한 권력 다툼”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단순히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라, 사법부를 향한 정치적 견제 자체가 본질적으로 부당하다는 주장이 된다.

이 둘은 전혀 다른 논리다.

우선순위 비판이라면 “사법 개혁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은 민생을 먼저”가 된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실제로 주장하는 것은 “사법부에 대한 정치적 개입은 그 자체로 문제”라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 주장은 사법부를 어떤 민주적 견제에서도 자유로운 성역으로 만들자는 이야기와 구별되지 않는다.

민주주의 체계에서 사법부는 독립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이 견제 자체를 차단하는 면죄부는 아니다. 대법원장 탄핵 논의, 대법관 구성에 대한 국회의 관여, 사법부 예산과 인사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삼권분립의 파괴가 아니라 삼권분립의 작동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 영국의 사법 개혁 논의, 프랑스 헌법재판소를 향한 의회의 압력은 모두 이 경계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긴장이다.

조선일보는 그 긴장을 “때리기”로 번역해서 독자에게 전달했다.


한 가지 더 짚어야 한다. 조선일보는 2016년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2017년 사법농단 수사 초기에, 어떤 사설을 썼나. 사법부가 권력에 복무한다는 비판이 진보 진영에서 나왔을 때 조선일보는 그것을 “때리기”라 불렀나, 아니면 “사법 독립 수호”라 불렀나.

이 질문은 조선일보 사설의 일관성이 원칙에 기반하는지, 아니면 어느 정권이 사법부와 마찰을 빚느냐에 따라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된다면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행위를 어떤 정권이 하느냐에 따라 “사법 독립 수호”와 “사법부 때리기”로 갈라 쓴다면, 그건 원칙이 아니라 정파적 서비스다.

조선일보가 오늘 사설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분석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사법부를 지금 이 구성 그대로 유지하려는 세력”의 이익과 정확히 일치한다.

집권 여당이 사법 개혁을 밀어붙이는 것이 정치적 동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 나는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권력은 항상 자신에게 유리한 구조를 선호한다. 여당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동기가 불순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요구의 내용이 틀렸다는 것은 별개의 논증이다. 조선일보는 그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동기를 공격함으로써 내용 논쟁을 회피한다.

사법부는 정치에서 독립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의 민주적 통제에서 독립해서는 안 된다. 이 두 문장은 충돌하지 않는다. 조선일보의 사설이 이 둘을 계속 혼동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사설이 수행하는 진짜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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