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중앙일보 사설 한 편이 이런 제목을 달았다. “김어준 ‘與 결정장애 아니냐’ 기싸움…李도 못말리는 극한 내홍.” 제목만 보면 민주당이 지금 당장 분당 직전이라도 된 것 같다. 그런데 사설이 지목한 사건의 실체는 무엇인가. 김어준이 팟캐스트에서 조희대 탄핵 추진이 너무 느리다고 비판했고, 유시민이 현 정부 국정 운영 방식에 쓴소리를 했다. 이게 전부다.
중앙일보는 이것을 “극한 내홍”이라고 불렀다.
언론이 프레임을 짤 때 가장 즐겨 쓰는 기법 중 하나가 규모의 인플레이션이다. 실제 사건의 크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대신, 어휘 선택으로 독자의 인식 안에서 사건을 부풀린다. “내부 비판”은 “기싸움”이 되고, “기싸움”은 “내홍”이 되고, “내홍”은 “극한 내홍”이 된다. 각 단계에서 사실이 추가되는 게 아니다. 어휘만 교체된다. 독자는 가장 마지막 단어를 기억한다.
이번 사설이 정확히 그 구조로 작동하고 있다.
김어준과 유시민은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도 아니고, 당직자도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식 참모 라인에 있지도 않다. 이들은 민주당 지지층과 교감하는 논객이자 방송인이다. 이들이 정부 결정에 비판적 발언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주의의 작동이다. 지지자들이 정부에 쓴소리를 할 수 있는 문화. 그 쓴소리가 공개 공간에서 유통될 수 있는 환경. 이것이 없는 진영이 오히려 비정상 아닌가.
중앙일보 사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을 비교가 하나 있다.
국민의힘은 지난 몇 년 동안 당 대표가 대통령 눈치를 보며 공개 발언을 자기검열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연출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당내에서 대통령의 결정에 공개 이의를 제기한 의원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다. 그 일사불란함을 중앙일보는 “단결”이라고 불렀는가, 아니면 “경직”이라고 불렀는가.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중앙일보의 어휘 선택은 전자에 가까웠다.
같은 현상을 두고 진영에 따라 다른 단어를 쓰는 것, 그것이 프레임이다.
물론 반론은 가능하다. 김어준의 영향력이 일반 논객과 다른 수준이고, 그가 민주당 지지층 내 여론 형성에 실질적 힘을 행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발언이 단순한 외부 비판 이상의 정치적 무게를 가진다는 주장이다. 즉, 외양은 ‘지지자의 쓴소리’지만 실질은 ‘당내 압박’이라는 독해다.
이 반론을 무시하지는 않겠다. 김어준의 발언이 정치적 맥락 없이 공중에 떠 있는 게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발언이 가리키는 내용, 즉 조희대 탄핵 추진 속도에 대한 이의 제기는, 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서 실제로 광범위하게 공유되던 감각이다. 특정 인물이 그 감각을 대변했다고 해서 그것을 “내홍”으로 규정하는 것은, 여론과 내분을 혼동하는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앙일보가 이 사설에서 생략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국민의힘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12·3 계엄 사태에 가담했거나 방조한 인사들을 당 안에서 어떻게 처리했는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과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들이 당내에서 공개적으로 나오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중앙일보 사설은 그 질문들을 다루지 않았다. 민주당 지지 논객의 발언 하나에 “극한 내홍”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설이, 헌정 질서를 둘러싼 훨씬 근본적인 균열에 대해서는 침묵을 택했다.
이 침묵 자체가 이 사설이 설정한 프레임의 기능을 드러낸다. 독자의 시선을 민주당 내부의 소소한 긴장감으로 끌어들이는 동안, 훨씬 무거운 질문은 화면 밖으로 밀려난다.
토론이 있는 정당과 없는 정당 중 어느 쪽이 더 건강한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거창한 민주주의 이론이 필요하지는 않다. 지지자가 당에 아무 말도 못 하는 구조는 지지가 아니라 복종에 가깝다. 복종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정당이 권력을 잡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2024년 12월에 이미 한 번 봤다.
중앙일보가 “극한 내홍”이라고 부른 장면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민주당 지지층이 자기 당에 말을 걸고 있는 장면이다. 그 말이 불편하면, 정당이 응답하면 된다. 그것이 정상적인 정치다. 그 과정을 내홍으로 규정해 봉인하려는 시도야말로, 실제로 건강하지 않은 정치 문화를 어느 편에서 요구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