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사설 하나가 프랑스를 소환했다. 2025년 봄, 사설 제목은 이렇게 읽힌다. 이재명 정부가 지금 이대로 가면 재정 위기를 자초한 프랑스의 전철을 밟는다. 복지 포퓰리즘에 중독된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보라는 경고다.
그런데 비교 대상으로 프랑스를 고른 것 자체가 이미 논리가 아니라 이미지 정치다.
프랑스의 국가채무비율은 GDP 대비 110%를 넘는다. 한국은 현재 약 50% 수준이다. 수치로만 보면 두 나라는 같은 문장 안에 묶을 수 없는 상태다. 그런데 사설 어디에도 이 숫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프랑스를 언급하면서 정작 프랑스와 한국의 재정 상태를 비교하는 수치를 빠뜨렸다는 것, 이건 실수가 아니다. 그 수치가 들어오면 비유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이 숫자를 선택적으로 쓸 때, 그 선택 자체가 메시지다.
국민연금 관련 서술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설은 주식 비중 확대로 발생한 182조 원의 평가손실을 다뤘다. 숫자만 보면 아찔하다. 그런데 국민연금 총 운용 자산은 1100조 원이 넘는다. 182조는 그 안에서 발생한 단기 시장 변동에 따른 평가손실이다. 장기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단기 평가손실은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있고, 국민연금 같은 초장기 펀드에서 이걸 ‘노후자금이 위험하다’는 식으로 읽는 건 의도적 과장이거나 금융 문해력의 문제다. 사설을 쓴 논설위원이 그 차이를 몰랐을 리 없다.
821조 슈퍼 예산이라는 표현도 쓰였다. 숫자는 크다. 그러나 그 예산의 내역이 무엇인지, 복지·교육·인프라·연구개발의 비중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는 단 한 줄도 다루지 않았다. “821조”라는 숫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분석이 아니라 감각이다. 많다, 너무 많다, 방만하다. 사설은 그 감각을 심는 데 집중했다.
이 사설이 판 구도
이 사설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재정 분석이 아니다. 확장 재정은 곧 포퓰리즘이고, 포퓰리즘은 곧 나라를 망친다는 등식을 독자의 머릿속에 새기는 것이다. 그 등식이 한번 박히면, 이후 민주당 정부의 어떤 지출 결정도 ‘선심성’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읽히게 된다. 사설의 논리가 실제로 맞는지보다, 그 프레임이 여론에 어떻게 남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건 중앙일보가 처음 쓰는 방식이 아니다. 복지 지출이 늘어날 때마다 그리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그리고 이번에는 프랑스가 등장한다. 공통점은 하나다. 한국과 재정 구조가 완전히 다른 나라를 골라, 결말만 잘라 붙이는 것이다. 맥락은 지우고 공포만 남긴다.
이 방식에 반론을 제기하면 으레 돌아오는 말이 있다. “그래도 방향이 문제 아니냐. 지금은 50%여도 계속 늘면 프랑스 된다.” 이 반론은 나름 들을 만하다. 재정 건전성은 방향도 중요하다. 적자가 매년 쌓이면 결국 감당 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 반론이 성립하려면 먼저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현 정부의 재정 계획이 실제로 구조적 적자를 고착화하는 방향인지, 아니면 경기 사이클에 대응하는 일시적 확장인지다. 그리고 그 지출이 장기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투자 성격인지, 순수한 소비성 이전지출인지도 구분해야 한다. 사설은 이 질문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고, 숫자는 그 결론을 포장하는 데 쓰였다.
긴축이 항상 옳다는 명제는 경제학 안에서도 논쟁 중인 주제다. 2010년대 유럽의 긴축 실험은 그 결과가 이미 나와 있다. 긴축을 가장 강하게 밀어붙인 나라들에서 회복이 지연되었고, 사회적 비용이 가장 가파르게 올라갔다. IMF조차 나중에 자신들의 긴축 권고가 성장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과소평가했다고 인정했다. 이 사실은 중앙일보 사설에 없다.
물론 재정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다. 그 점에서 재정 건전성 논의는 필요하다. 그런데 건전성 논의는 지출의 총량이 아니라 구성과 효율, 그리고 수입 구조와의 균형을 봐야 한다. 세수 기반을 어떻게 확충할 것인지, 조세 구조의 누진성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지출의 어느 항목이 실제로 비효율적인지—이런 질문들이 진짜 재정 논의다.
“돈 쓸 궁리만 한다”는 사설 제목은 그 논의를 원천 차단한다. 지출 자체를 궁리, 즉 잔꾀로 규정함으로써, 무엇을 왜 얼마나 쓰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비집고 들어갈 틈을 남기지 않는다.
그게 이 사설의 가장 교묘한 지점이다. 논증이 아니라 어휘가 먼저 프레임을 닫아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