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사설 분석] 프랑스 청년의 절망…한국은 다르다고 할 때 아니다

중앙일보가 2025년 봄, 프랑스 청년 시위를 한국 독자에게 소개하면서 붙인 문장은 대략 이런 방향이었다. “프랑스의 오늘이 한국의 내일이 될 수 있다.” 확장 재정을 계속 쓰다간 프랑스처럼 된다는 경고다. 청년 이야기로 포장됐지만, 사설의 방향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재명 정부의 재정 정책을 겨냥한 것이다.


프랑스 청년들이 거리로 나온 배경은 복합적이다.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혁 강행, 교육 예산 삭감, 고용 시장의 구조적 경직성, 그리고 GDP 대비 119%에 달하는 국가채무가 만들어낸 재정 압박. 이 맥락을 중앙일보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사설은 그 복잡한 인과를 단 하나의 변수로 압축한다. ‘빚을 너무 많이 졌기 때문’이라고.

한국의 국가채무 GDP 비율은 2025년 현재 50% 초중반이다. 프랑스의 절반도 안 된다. 이 수치를 나란히 놓으면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산수의 결론인데, 중앙일보 사설은 이 격차를 의도적으로 흐린다. 숫자를 숨기지는 않는다. 다만 맥락을 빼버린다. “지금은 달라도, 가다 보면 그렇게 된다”는 공포의 논리로 채운다.

이것이 이 사설이 구사하는 첫 번째 기술이다. 현재의 차이를 미래의 위험으로 치환하는 것. 반박하기 어렵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청년을 호출하는 방식

하지만 이 사설이 진짜 기민한 부분은 따로 있다. 청년을 주어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재정 긴축을 정면으로 주장하면 누가 찬성하겠는가. 복지 삭감, 일자리 예산 축소, 공공투자 감소. 보수 언론도 안다. 그 단어들이 얼마나 민감한지. 그래서 청년을 호출한다. “청년들이 거리로 나왔다”는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청년이 피해자’라는 인상을 먼저 심는다. 그 다음 논리가 연결된다. ‘청년을 피해자로 만든 원인은 방만한 재정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도 재정을 줄여야 청년을 지킬 수 있다.’

청년 걱정처럼 읽히지만, 결론은 긴축이다.

이 구조에서 빠진 질문이 있다. 청년 일자리 문제가 언제부터, 왜 악화됐는가. 통계청 자료를 보면 청년 취업자 수는 윤석열 정부 임기 내내 하락세를 유지했다. 47개월 연속 감소라는 수치가 그 시기 누적된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중앙일보는 ‘청년의 절망’을 이 강도로 다뤘는가. 사설 아카이브를 뒤져볼 독자는 많지 않다. 중앙일보는 그것을 안다.

청년을 소환하는 타이밍이 절묘하게도, 긴축을 주장해야 할 시점과 일치한다는 것. 이것이 이 사설의 정치적 좌표다.


반론을 한 번 들어보자. “그래도 재정 건전성은 중요한 문제 아닌가. 확장 재정이 항상 옳은 건 아니지 않나.”

맞다. 재정에는 한계가 있고, 무한정 빚을 낼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이재명 정부의 재정 계획이 최선인지에 대한 합리적 논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 국채 금리 추이, 복지 지출의 효율성 문제. 이것들은 진지하게 다뤄야 할 주제다.

그런데 중앙일보가 그 논쟁을 하고 있는가.

재정적자의 적정 수준이 얼마인지, 어떤 항목의 지출이 생산적이고 어떤 항목이 낭비인지, 청년 고용에 실질적으로 효과 있는 정책이 무엇인지. 사설에 그런 분석은 없다. 대신 프랑스의 이미지가 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청년들, 재정 위기, 삭감되는 예산. 논리보다 이미지가 먼저다.

재정 건전성이 진짜 관심사라면, 윤석열 정부 5년간의 재정 운용을 같은 날카로움으로 해부했어야 한다. 법인세 인하로 줄어든 세수, 감세 정책이 재정에 미친 영향, 그 시기 국가채무 증가 속도. 중앙일보 사설이 그 시기 재정 건전성을 이 정도 긴박한 어조로 경고했다는 기억이 없다.

재정 걱정의 유통기한이 정권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것은 재정 논평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다.


비교의 윤리라는 것이 있다. 다른 나라의 고통을 끌어와 자국의 정책 논쟁에 활용할 때, 그 고통의 맥락을 정확하게 전달할 의무가 생긴다. 프랑스 청년들이 거리로 나온 것은 단순히 나라가 빚을 많이 져서가 아니다. 그 빚의 상당 부분이 어떻게 쌓였는지, 긴축의 칼날이 누구에게 먼저 떨어졌는지, 마크롱의 연금 개혁이 어떤 방식으로 강행됐는지. 그 모든 것이 분노의 재료였다.

중앙일보가 그 맥락을 진심으로 전달하고 싶었다면, 프랑스 사례는 오히려 다른 교훈을 가리켰을 것이다. 긴축이 청년을 거리로 내몬다는 교훈.

사설이 그 결론에 도달하지 않은 것은 분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도달하고 싶지 않아서다. 프랑스는 이 사설 안에서 사례가 아니라 장치다. 독자의 불안을 키우는 장치. 그 불안이 향하는 곳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재명 정부의 재정 확대.

청년의 이름을 빌려 청년 정책에 반대하는 논리. 그것이 이 사설의 정체다. 반박이 어려운 이유는 논리가 치밀해서가 아니라, 감정의 언어로 포장돼 있어서다. 청년의 절망이라는 말 앞에서 누가 선뜻 “그 걱정은 가짜다”라고 말하겠는가.

그래서 더 꼼꼼히 읽어야 한다.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청년을 소환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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