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미국에만 보고한 한국 정부 리스크
팩트부터 깔고 가자
2024년 상반기, KB금융·신한금융·우리금융 3사가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제출한 사업보고서(Form 20-F)에 흥미로운 항목이 등장했다.
“Risk Factors” 섹션.
여기에 이들은 명시적으로 적었다. “한국 정부의 포용금융 정책은 저소득층·저신용자 대출 확대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연체율 상승과 자산건전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근데 같은 시기, 국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사업보고서엔 이 내용이 없다. 아예 빠져 있다. 미국 투자자들에게만 “이거 리스크 맞습니다”라고 신고한 거다.
이게 뭘 의미하냐면, 한국 금융사들이 미국에서만 솔직해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국 정부의 정책을 위험 요소로 지목하면서 말이다.
숫자가 말해주고 있다
말이 아니라 데이터를 보자.
2024년 1분기 기준, 국내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은 0.48%로 전년 동기 대비 상승세를 기록했다. 개인사업자 연체율은 더 심각하다. 일부 은행에서 1%를 넘어섰고, 특히 정책성 대출이 집중된 구간에서 급등세가 두드러진다.
더 기가 막힌 건 금리 역전 현상이다. 금융의 가장 기본 원리는 간단하다. 위험이 높으면 금리가 높다. 그게 리스크 프리미엄이고, 시장의 언어다.
그런데 일부 정책금융 상품에서 저신용자의 금리가 고신용자보다 낮게 책정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신용등급 7~10등급 차주가 1~3등급 차주보다 더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는 구조. 이건 금융이 아니라 재정이다. 시장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영역이다.
포용금융의 두 얼굴
포용금융 자체가 나쁜 정책은 아니다. 금융 접근성이 낮은 계층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건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다. 문제는 어떻게 설계하느냐다.
현재 한국 정부의 포용금융 기조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요약된다.
1. 저소득·저신용층 대출 문턱 낮추기
2. 금리 인하 유도 및 정책금융 확대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리스크를 누가 떠안느냐는 것이다.
정부가 재정으로 보증하고, 손실을 국가가 흡수하는 구조라면 그나마 지속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은? 민간 은행에 대출 쿼터를 요구하고, 금리는 시장보다 낮게 책정하게 하고, 연체 리스크는 은행이 고스란히 떠안는다. 이건 민간에게 재정 역할을 떠넘기는 구조다.
그 결과, 은행들은 건전성 지표가 악화되고,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주주 가치가 훼손된다. 그래서 미국 투자자들에게 “이거 위험합니다”라고 보고한 거다.
여기서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이 사안의 본질은 단순히 “포용금융이 좋은가, 나쁜가”가 아니다.
정책의 투명성과 책임 소재다.
KB·신한·우리금융이 국내 공시엔 빼고, 미국 공시엔 넣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한국 투자자와 미국 투자자를 다르게 대한다는 뜻이다. 정보 비대칭이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정부가 정책 리스크를 민간에 떠넘기면서도 그 리스크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회 본회의에서도, 금융위 브리핑에서도 “포용금융은 선의”라는 수사만 반복할 뿐, 그로 인한 시스템 리스크는 말하지 않는다.
근데 은행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미국 투자자들에게만 조용히 경고한 거다. “우리 정부 정책, 이거 리스크 맞습니다.”
BluntEdge 관점
이걸 번역하면 이렇다:
“선의로 포장하면, 리스크도 안 보이나?”
아니다. 리스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누가 떠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지금 구조에선 민간 금융사가 떠안고, 결국 연체율 상승으로 현실화되면 예금자와 주주가 피해를 본다. 정부는? 포용금융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받는다.
포용금융을 하려면 제대로 하자. 재정으로 보증하고, 손실을 국가가 책임지고, 그 비용을 예산에 명시하라. 그게 투명한 정책이다. 민간에 떠넘기고, 시장 원리를 왜곡하고, 리스크는 숨기는 건 선의가 아니라 포퓰리즘이다.
금융사들이 미국에만 솔직했다는 건, 국내에선 말하기 힘든 환경이란 뜻이다. 그게 더 큰 문제다. 정책 비판이 “반서민”으로 프레이밍되고, 리스크 경고가 “금융권 이기주의”로 매도되는 구조. 이러면 누가 제대로 된 경고를 하겠는가.
숫자는 이미 말하고 있다. 연체율은 오르고, 건전성은 악화되고, 금리는 왜곡됐다. 이제 선택할 시간이다. 계속 눈 감고 “포용”을 외칠 건가, 아니면 팩트를 직시하고 정책을 재설계할 건가.
한 줄 결론:
선의로 포장된 리스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누가 떠안느냐의 문제일 뿐.
BluntEdge — 무딘 척하지만, 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