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양자토론 압박하는 진짜 이유
팩트부터 깔고 가자
조선일보가 또 사설을 냈다. 민주당 후보들더러 양자 토론에 나오라고 압박하는 내용이다. “유권자의 알 권리”, “정책 검증”, “민주주의 가치” 같은 그럴듯한 단어들이 즐비하다. 근데 이런 류의 논설을 볼 때는 항상 한 가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과거에는 어땠나?
2022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를 돌아보자. 당시 양자 토론을 먼저 제안한 쪽은 야당이었던 민주당이었다. 박영선 후보가 오세훈 후보에게 양자 토론을 제안했고, 오세훈은 이를 사실상 회피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지금처럼 “토론 회피는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라는 식의 격양된 사설을 쓰지 않았다.
2025년 지금, 상황이 정확히 뒤바뀌었다.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민주당 정원오 후보에게 양자 토론을 제안하고 있고, 정 후보 측이 이를 사실상 거부하는 상황이다. 그러자 조선일보가 갑자기 “유권자 알 권리”를 외치기 시작했다.
숫자가 말해주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정원오 후보는 40%대 중후반, 오세훈 후보는 30%대 후반에서 40% 초반 사이를 오가고 있다. 격차는 대략 5~8%포인트. 오차범위 밖이지만, 역전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양자 토론”이라는 카드가 꺼내진 것이다.
선거판의 불변 법칙
여기서 핵심은 딱 하나다. 왜 입장이 바뀌었나?
답은 간단하다. 여론조사 수치 때문이다. 앞서는 쪽은 토론을 회피하고, 뒤처진 쪽이 토론을 요구하는 건 동서고금 불변의 선거 법칙이다. 미국 대선도, 한국 총선도, 심지어 학생회장 선거도 마찬가지다.
왜냐? 앞서는 후보에게 토론은 리스크만 있고 이득이 없다. 실수 한 번이면 격차가 좁혀지고, 잘해봤자 현상 유지다. 반면 뒤처진 후보에게 토론은 유일한 역전 기회다. 한 방이면 판을 뒤집을 수 있다.
2022년 오세훈은 앞서고 있었다. 그래서 양자 토론을 회피했다. 2025년 오세훈은 뒤처져 있다. 그래서 양자 토론을 요구한다. 이건 계산이고, 전략이고, 정치다. 문제는 이걸 마치 “민주주의 원칙”인 양 포장하는 언론의 태도다.
조선일보의 번역법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정책과 비전을 직접 비교할 권리가 있다.” 맞는 말이다. 근데 이 논리가 항상 적용된 건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2022년에는? 조선일보는 오세훈의 토론 회피를 특별히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안정적 선거 운동”, “표심 결집” 같은 표현으로 옹호하는 뉘앙스였다. 근데 2025년엔 갑자기 토론 회피가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이 됐다.
이걸 번역하면 이렇다. “우리 후보가 지고 있으니까 토론으로 역전 기회 만들어달라.”
이건 보수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 언론도 마찬가지다. 2022년엔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양자 토론 회피는 도피”라고 비판했지만, 2025년엔 “다자 토론이 더 민주적”이라고 프레임을 바꿨다. 결국 모두가 자기 진영 후보의 유불리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근데 진짜 문제는 토론 형식이 아니다. 정책 검증보다 진영 논리로만 토론을 바라보는 한국 정치, 그 자체다.
양자 토론이든 다자 토론이든, 중요한 건 “무엇을 묻고 답하느냐”다. 서울시장 후보라면 부동산 정책, 교통 대책, 재정 건전성, 복지 우선순위 같은 걸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근데 실제 토론장에서는 뭐가 오가나? “당신 당 대표가 어쩌고”, “과거 정부가 저쩌고” 같은 정치 공방만 난무한다.
조선일보도, 한겨레도, 진짜 “유권자 알 권리”를 원한다면 토론 형식보다 토론 질문의 질을 따져야 한다. “왜 양자 토론을 해야 하나”보다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나”를 고민해야 한다. 근데 그런 사설은 안 나온다. 왜? 그건 진영 논리와 무관하니까.
결국 이 모든 논란은 정책 대결이 아니라 진영 대결의 연장선일 뿐이다. 토론 형식을 둘러싼 공방은, 유권자를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진영 후보를 위한 것이다.
BluntEdge 관점: 유권자는 호구가 아니다
유권자들은 이미 안다. 2022년과 2025년 사이에 “민주주의 원칙”이 바뀐 게 아니라, 진영의 유불리가 바뀌었다는 것을. 조선일보의 사설이 갑자기 정의로워진 게 아니라, 지지하는 후보가 뒤처졌다는 것을.
이런 식의 언론 플레이는 단기적으론 먹힐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신뢰를 갉아먹는다. 유권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언론이 진영 논리로 입장을 바꾸는 걸 계속 지켜만 보진 않는다.
토론은 해야 한다. 양자든, 다자든. 근데 그 이유는 “조선일보가 원해서”가 아니라 “유권자가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할 필요가 있어서”여야 한다. 그리고 토론이 제대로 되려면, 언론이 먼저 진영 프레임을 내려놔야 한다.
결론
양자 토론 논란의 본질은 정책 검증이 아니라 진영 유불리다. 언론이 원칙보다 진영을 앞세우는 한, 어떤 토론도 유권자를 위한 게 아니다.
숫자가 말해주고 있다. 2022년과 2025년, 바뀐 건 원칙이 아니라 여론조사 수치다. 조선일보의 사설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 후보 살리기”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진짜 알 권리를 원한다면, 토론 형식 공방 대신 후보들에게 던질 질문의 질부터 논하자. 그게 진짜 유권자를 위한 길이다.
BluntEdge — 무딘 척하지만, 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