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정권 침해에 맞선 2030, 그들의 분노에 귀 기울여야
**팩트부터 깔고 가자.**
잠실7동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2025년 6월 3일, 지방선거일. 서울 잠실7동 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투표용지를 받지 못했다. 투표용지가 부족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초보적 실수로, 헌법이 보장하는 참정권이 현장에서 막혀버린 것이다.
이 사건이 단순한 행정 착오로 끝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투표소 앞까지 줄을 선 시민들 중 상당수가 2030 세대였다는 점이다. 평소보다 높은 청년 투표율이 기대되던 선거였고, 그 기대가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꺾였다. 청년들이 거리로 나왔다. 분노했다. 그 분노는 정당하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없는 팩트다.
“귀 기울이겠다”는 말들의 정체
사건 이후 정치권의 반응은 빨랐다. 너무 빨랐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청년들의 집회를 언급하며 참정권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표면적으로는 당연한 반응처럼 보인다. 그런데 맥락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시 장동혁 대표는 내부 사퇴 압박을 받고 있던 시점이었다. 청년들의 집회는 그에게 방패가 됐다.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타이밍에, 2030의 분노가 소환된 것이다.
이걸 번역하면 이렇다: “청년들이 거리에 나섰으니 나는 아직 필요한 사람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청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가. 아니다. 그건 청년의 분노를 정치 생존 도구로 전환하는 것이다.
민주당의 침묵, 그것도 선택이다
근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친민주당 성향의 유명 유튜버가 2030 청년들을 향해 “몽둥이가 필요하다”는 발언을 했다. 명백한 혐오 표현이자, 청년들의 정치 참여를 위협하는 언사다. 이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은 침묵했다.
침묵도 하나의 언어다. 그것도 명확한 언어다.
“우리 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조용히 넘어가겠다.” 이게 민주당의 선택이었다. 청년들의 참정권을 지키겠다는 말과, 그 청년들을 위협하는 발언 앞에서의 침묵 — 이 두 개는 공존할 수 없다. 그 모순을 2030은 이미 눈치채고 있다.
여기서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행동 방식을 나란히 놓아보면 구조가 보인다.
이용하거나 무시하거나. 결국 같은 결론이다. 청년은 이 정치판에서 주체가 아니라 소재(素材)다.
2030은 이미 알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딱 하나다.
청년들은 이미 영리하다. 자신들의 분노가 어떻게 소비되는지,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마이크를 가져다 대는지 — 그들은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다. 집회 현장의 청년들은 특정 정당의 깃발을 들지 않았다. 어느 정치인의 이름을 외치지 않았다. 요구는 명확했다: 참정권을 침해한 선관위를 처벌하라, 제도를 개선하라.
이것이 2030 정치 참여의 질적 변화다. 과거 세대의 청년 운동이 특정 이념이나 정당의 동원 구조 안에서 작동했다면, 지금의 2030은 그 구조 밖에서 움직이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가 누군가의 정치 자산이 되는 순간을 혐오한다.
숫자가 말해주고 있다. 2030의 정당 지지율은 역대 어느 세대보다 낮다. 특정 정당에 안착하지 않는다. 그건 무관심이 아니라 불신이다. 정치가 자신들을 도구로 써왔다는 누적된 학습의 결과다.
“귀 기울여야 한다”는 말의 함정
보수 언론은 이번 사태를 두고 “2030의 분노에 정치권이 귀 기울여야 한다”는 논평을 냈다. 언뜻 맞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프레임이 설정하는 구조를 보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수사는 청년을 수동적 존재로 위치시킨다. 정치가 들어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주체이고, 청년은 들어주길 기다리는 대상이다. 이 프레임 안에서 청년은 영원히 기다리는 자다.
BluntEdge의 독법은 다르다. 지금 2030은 귀 기울여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발언하고 있고, 그 발언을 누가 가로채는지를 감시하고 있다. 정치가 청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게 아니라, 정치가 청년의 목소리를 더 이상 가로채지 못하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 구조 변화의 첫 번째 조건은 간단하다. 선관위가 투표용지를 떨어뜨리지 않는 것.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책임지는 사람이 나오는 것. 그 위에 정치적 수사를 쌓기 전에.
결론
청년의 분노는 정당하다. 그 분노를 이용하는 정치는 정당하지 않다. 그리고 2030은 그 차이를 구분할 만큼 이미 충분히 영리하다.
문제는 청년들보다 정치가 아직 덜 영리하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 영리하지 않은 게 아니라 영리함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청년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척하면서, 그 소리를 자기 정치에 맞게 편집한다.
그 편집을 허락하지 않는 것. 지금 2030이 하고 있는 일이다.
**”2030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 — 맞다. 단, 그 귀는 자기 정치를 위한 집음기가 아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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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ntEdge — 무딘 척하지만, 벤다.